겨울 측량의 어려움

Writer. 오복동((前) 한국국토정보공사 가평지사장)

겨울이면 온 몸이 웅크러진다. 차가운 날씨에 온 세상이 꽁꽁 얼 어붙고, 바깥 활동도 하기 어렵다. 측량도 그렇다. 날씨가 추울수 록 관측도 어렵지만 조표를 세우기는 더욱 어렵다. 기지점을 찾 는 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디 일이라는 것이 날씨를 가려서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숨은 이야기에서는 추운 날씨와 관련된 이야 기해 보고자 한다. 1970년대 초반 통영에서 있었던 이정부 님 의 이야기다.1)

1971년 경상남도 통영군 용남면 죽림리 인근에 약 20ha의 경 지정리지구 확정 측량 요청이 대한지적협회 부산지부 직할출 장소로 들어왔다. 당시는 지적협회 부산지부에서 부산과 경남 을 함께 관할하던 때였다. 부산에서 통영까지는 그리 먼 길은 아 니었지만 도로가 좁고 비포장된 곳이 많아 아침 일찍 출발하더 라도 저녁 무렵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확정 측량을 위해 통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기울어서 측량을 바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조금 늦었지만 군청과 지적협회에 도착 신고를 하고 저녁 식사 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기지삼각점을 찾아 조표를 하기 위해 2명을 한 팀 으로 2팀이 산에 올랐는데 A팀은 원문포구 서쪽 제석봉(해발 279m의 기지점 천28)로, B팀은 원문포구 동쪽 원평리(해발 109m의 천104)와 장문리 삼봉산(해발 242m의 기지점 천 17)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날 해질 무렵 약속한 식당에서 만난 모습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날 A팀은 “천15” 하나만 찾았을 뿐 다른 점은 찾지 못하고 종일 헛수고만 했다. 그것도 그럴 것 이 당시에는 지표상에 보여야 할 삼각점 표석을 동네 아이들이 장난으로 훼손하는 일이 잦았고, 어른들도 ‘일본 사람들이 조선 땅에 정기를 끊는다고 산의 맥마다 돌심을 박았다’하여 뽑아버 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반석은 흙에 묻혀 얼어 있는 일도 있 어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얼어붙은 땅을 파서라도 반석 을 찾아야 하는데, 겨울 바람이 세찬 산꼭대기 어디를 파야할지, 또 아주 못 찾으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었다. 지금도 기지삼각점 을 찾으려면 이렇게 언 땅을 찾아야지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다음날 산꼭대기를 파낼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고 어제 올랐던 산을 다시 올랐다. 꼭 찾아야 하지만 만일 못 찾으면 그 자리에 조표를 하되 ‘못찾은 점’이라는 표시로 깃발을 뒤집어 기(상백 하홍)를 달기로 약속했다. 이런 점은 기지삼각점을 찾는 가까운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삼각망 구성상 보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작업이다.

1) 지적, 2000년 7월호에 실린 이정부 님의 사례를 재구성하였다.

아침 10시쯤 산꼭대기에 도착해 반석이 있을 만한 지점을 팠 다. 하지만 땅이 얼어서 곡괭이 끝이 탱탱 튕길 뿐 파지지 않았 다. 바람도 얼마나 센지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바 람에 눈물이 어려 앞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점심시간에 가져간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산꼭대기를 다 뒤지다시피 파 보 았지만 찾지 못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 B팀 이 “천104”의 반석을 찾았다고 해, 반가워 얼싸안고 겅중겅중 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은 두 점으로는 사각망을 구성 할 수 있겠으나 기지삼각점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 위험했다.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삽입망인데 그러자면 기지삼각점을 한 점 더 찾아야 했다. 그러나 정확한 지점도 모르면서 얼어붙은 땅을 파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날 밤 측량에 참여한 사람들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분위기를 전환할 필 요가 있었다. 이런 때에는 술이 제격이었다. 그나마 나름 명분을 세웠다. “고사를 지내자”는 명분이었다.
“산신에게 고하지 않아 기지삼각점을 찾기가 어려우니 늦었지 만 오늘 고사라도 지내자”라고 누군가 제안을 했다. 고사를 지 내자는 구실도 있었겠지만 아마 모두들 찬 바람에 지친 몸을 술 로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식당 종업원들 이 우리를 요상한 눈초리로 봤다. 작업복 차림에 흙 묻은 신발, 시커멓고 거칠어 뵈는 몰골을 수상하게 보는 시선은 어쩌면 당 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더 이상한 답변을 한 것이 화근이 었다. “어데서 왔는데예”라고 묻는 종업원의 물음에 “산에서 왔 십니더”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러고 아무 생각없이 산신께 정성 껏 예를 갖춘 다음 고사를 지내고, 각자 들었던 잔을 비우고 주 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다가 통행금지가 되기 전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관으로 돌아와서 곯아떨어진 것도 잠시 측 량사들에게 벼락이 떨어졌다.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아마도 식당 종업원이 측량사들을 수상히 여기고 신고를 한 모양이다. 그래도 책임자가 통영군 지적계장과 지적협회 출장소장집에 전 화를 걸어 신분을 확인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어 이전의 이틀보다 훨 씬 추웠다. 하지만 “천28”과 “천172점 중 한 점이라도 찾아 야했다. 모두가 간절히 원한 것을 하늘이 들으셨던지 “천17”은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천17”은 장문리 삼봉산(해발242m) 꼭대기에 있다. 그런데, 지형상 겨울이 되면 서북풍이 원문포를 건너 삼봉산의 급경사 를 거슬러 올라와 산 정상에서도 그대로 치솟는 바람에, 산 정 상에서는 측량기계를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분다. 1910 년대에 삼각점을 처음 선점하고 매설한 날도 아마 그랬던 모양 이다. 그래서 이를 피하려고 무풍지점을 찾아 삼각점을 설치했 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정상에서 동쪽으로 약 10m 지점이다.
측량사들은 반석을 찾으려고 산 정상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면 서 교대로 땅을 팠다. 그리고 교대로 쉴 때가 되면 바람이 잔잔 한 동쪽 10m지점의 얕은 웅덩이에 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하루종일 산 정상을 깊고 넓게 팠지만 반석은 없었다. 저녁이 되 어서도 반석을 찾지 못하고, 보점용 깃발을 세우고 하산을 위해 불을 껐다. 불을 끄면서 땅을 헤집는데 땅 바닥이 이상했다. 작 대기 끝이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불을 피웠으니 땅이 녹았을 텐데 이상했다. 무언가 싶어 헤쳐 보니 중앙에 +자 가 새겨진 반석이 있었다.
갑자기 “으~이, 으~이” 비명 같은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달려왔 다. 달려온 두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 쳐들며 “찾았다! 반석을 찾 았다!”하고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며칠간의 고생이 한 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중에 해가 지고 바 람이 차가워졌지만 측량사들은 춥지 않았다. 추위 속을 뚫고 목 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겨울 측량의 어려움

Writer. 오복동((前) 한국국토정보공사 가평지사장)

겨울이면 온 몸이 웅크러진다. 차가운 날씨에 온 세상이 꽁꽁 얼 어붙고, 바깥 활동도 하기 어렵다. 측량도 그렇다. 날씨가 추울수 록 관측도 어렵지만 조표를 세우기는 더욱 어렵다. 기지점을 찾 는 일도 그렇다. 하지만 어디 일이라는 것이 날씨를 가려서 할 수 있겠는가. 이번 숨은 이야기에서는 추운 날씨와 관련된 이야 기해 보고자 한다. 1970년대 초반 통영에서 있었던 이정부 님 의 이야기다.1)

1971년 경상남도 통영군 용남면 죽림리 인근에 약 20ha의 경 지정리지구 확정 측량 요청이 대한지적협회 부산지부 직할출 장소로 들어왔다. 당시는 지적협회 부산지부에서 부산과 경남 을 함께 관할하던 때였다. 부산에서 통영까지는 그리 먼 길은 아 니었지만 도로가 좁고 비포장된 곳이 많아 아침 일찍 출발하더 라도 저녁 무렵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확정 측량을 위해 통영에 도착하니 해가 이미 기울어서 측량을 바로 진행하기 어려웠다. 조금 늦었지만 군청과 지적협회에 도착 신고를 하고 저녁 식사 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기지삼각점을 찾아 조표를 하기 위해 2명을 한 팀 으로 2팀이 산에 올랐는데 A팀은 원문포구 서쪽 제석봉(해발 279m의 기지점 천28)로, B팀은 원문포구 동쪽 원평리(해발 109m의 천104)와 장문리 삼봉산(해발 242m의 기지점 천 17)으로 올랐다. 그러나 그날 해질 무렵 약속한 식당에서 만난 모습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날 A팀은 “천15” 하나만 찾았을 뿐 다른 점은 찾지 못하고 종일 헛수고만 했다. 그것도 그럴 것 이 당시에는 지표상에 보여야 할 삼각점 표석을 동네 아이들이 장난으로 훼손하는 일이 잦았고, 어른들도 ‘일본 사람들이 조선 땅에 정기를 끊는다고 산의 맥마다 돌심을 박았다’하여 뽑아버 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반석은 흙에 묻혀 얼어 있는 일도 있 어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내일은 얼어붙은 땅을 파서라도 반석 을 찾아야 하는데, 겨울 바람이 세찬 산꼭대기 어디를 파야할지, 또 아주 못 찾으면 어떻게 할지 걱정이었다. 지금도 기지삼각점 을 찾으려면 이렇게 언 땅을 찾아야지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다음날 산꼭대기를 파낼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고 어제 올랐던 산을 다시 올랐다. 꼭 찾아야 하지만 만일 못 찾으면 그 자리에 조표를 하되 ‘못찾은 점’이라는 표시로 깃발을 뒤집어 기(상백 하홍)를 달기로 약속했다. 이런 점은 기지삼각점을 찾는 가까운 기준이 될 수도 있고 삼각망 구성상 보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작업이다.

1) 지적, 2000년 7월호에 실린 이정부 님의 사례를 재구성하였다.

아침 10시쯤 산꼭대기에 도착해 반석이 있을 만한 지점을 팠 다. 하지만 땅이 얼어서 곡괭이 끝이 탱탱 튕길 뿐 파지지 않았 다. 바람도 얼마나 센지 옆 사람의 말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바 람에 눈물이 어려 앞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점심시간에 가져간 도시락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산꼭대기를 다 뒤지다시피 파 보 았지만 찾지 못하고 하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 B팀 이 “천104”의 반석을 찾았다고 해, 반가워 얼싸안고 겅중겅중 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찾은 두 점으로는 사각망을 구성 할 수 있겠으나 기지삼각점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 위험했다.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삽입망인데 그러자면 기지삼각점을 한 점 더 찾아야 했다. 그러나 정확한 지점도 모르면서 얼어붙은 땅을 파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날 밤 측량에 참여한 사람들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고개만 떨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분위기를 전환할 필 요가 있었다. 이런 때에는 술이 제격이었다. 그나마 나름 명분을 세웠다. “고사를 지내자”는 명분이었다.
“산신에게 고하지 않아 기지삼각점을 찾기가 어려우니 늦었지 만 오늘 고사라도 지내자”라고 누군가 제안을 했다. 고사를 지 내자는 구실도 있었겠지만 아마 모두들 찬 바람에 지친 몸을 술 로 위로받고 싶었을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 보니 식당 종업원들 이 우리를 요상한 눈초리로 봤다. 작업복 차림에 흙 묻은 신발, 시커멓고 거칠어 뵈는 몰골을 수상하게 보는 시선은 어쩌면 당 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더 이상한 답변을 한 것이 화근이 었다. “어데서 왔는데예”라고 묻는 종업원의 물음에 “산에서 왔 십니더”라고 답변한 것이다. 그러고 아무 생각없이 산신께 정성 껏 예를 갖춘 다음 고사를 지내고, 각자 들었던 잔을 비우고 주 거니 받거니 술잔을 돌리다가 통행금지가 되기 전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여관으로 돌아와서 곯아떨어진 것도 잠시 측 량사들에게 벼락이 떨어졌다.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아마도 식당 종업원이 측량사들을 수상히 여기고 신고를 한 모양이다. 그래도 책임자가 통영군 지적계장과 지적협회 출장소장집에 전 화를 걸어 신분을 확인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세 번째 날은 아침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어 이전의 이틀보다 훨 씬 추웠다. 하지만 “천28”과 “천172점 중 한 점이라도 찾아 야했다. 모두가 간절히 원한 것을 하늘이 들으셨던지 “천17”은 찾을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천17”은 장문리 삼봉산(해발242m) 꼭대기에 있다. 그런데, 지형상 겨울이 되면 서북풍이 원문포를 건너 삼봉산의 급경사 를 거슬러 올라와 산 정상에서도 그대로 치솟는 바람에, 산 정 상에서는 측량기계를 세울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분다. 1910 년대에 삼각점을 처음 선점하고 매설한 날도 아마 그랬던 모양 이다. 그래서 이를 피하려고 무풍지점을 찾아 삼각점을 설치했 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곳이 바로 정상에서 동쪽으로 약 10m 지점이다.
측량사들은 반석을 찾으려고 산 정상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면 서 교대로 땅을 팠다. 그리고 교대로 쉴 때가 되면 바람이 잔잔 한 동쪽 10m지점의 얕은 웅덩이에 불을 피우고 몸을 녹였다. 하루종일 산 정상을 깊고 넓게 팠지만 반석은 없었다. 저녁이 되 어서도 반석을 찾지 못하고, 보점용 깃발을 세우고 하산을 위해 불을 껐다. 불을 끄면서 땅을 헤집는데 땅 바닥이 이상했다. 작 대기 끝이 미끄러지는 것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불을 피웠으니 땅이 녹았을 텐데 이상했다. 무언가 싶어 헤쳐 보니 중앙에 +자 가 새겨진 반석이 있었다.
갑자기 “으~이, 으~이” 비명 같은 소리가 나자 사람들이 달려왔 다. 달려온 두 사람들은 두 손을 번쩍 쳐들며 “찾았다! 반석을 찾 았다!”하고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었다. 며칠간의 고생이 한 번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중에 해가 지고 바 람이 차가워졌지만 측량사들은 춥지 않았다. 추위 속을 뚫고 목 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