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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인류는 하나의 세계에서 지리적인 공간을 각자 점유하고 또 공유하며 살아왔다. 상상이나 문학 작품 속에서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 더 나아가 멀티버스에서의 삶을 그려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본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구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인간이 아닌 것(?)들이 SNS에서 마치 인간인 양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바로 메타버스와 가상인간, 버추얼 휴먼의 이야기다.

메타버스는 구현되는 새로운 공간에 사람들의 정신이 머무르고 그곳에서 이전의 현실 세계에서 영위하던 일상들이 하나둘씩 실현된다는 면에서 확실히 거대하고 엄청난 변혁임에 틀림없다. 메타버스를 인류의 정신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어젠다(Agenda)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버추얼 휴먼이다.

메타버스, 메타버스 하던데…

메타버스를 논할 때 단연 흥미로운 점은 ‘공간’으로서의 메타버스다. 제페토나 포트나이트, 마인크래프트나 동물의 숲 같은 가상세계나 현실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증강현실, 어스2(Earth2)와 같은 일부 거울세계는 그래픽부터 명확한 공간감을 주기에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메타버스=공간’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등호가 아닌 물음표를 떠올리게 되는 분야는 배달의민족이나 온라인 쇼핑몰과 같은 유형의 거울세계나 인스타그램, 유튜브와 같은 라이프로깅(Lifelogging, 개인이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만나고, 느끼는 모든 정보를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에 익숙한 인류의 사고체계에서는 2D 이미지와 동영상, 텍스트가 가득한 온라인 서비스를 또 다른 공간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과 코로나19는 물리적인 공간이 아닌 애플리케이션이나 웹서비스 그 자체를 인류가 머무르고 생활하는 또다른 공간으로 만들었다. 코로나19로 외부 활동이 급격히 줄어든 인류는 현실의 물리적인 공간에서 하던 많은 행동들을 디지털 세상에서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각자 술과 안주를 준비하고 줌과 같은 화상회의를 통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스마트폰 카메라를 향해 술잔을 부딪히는 웃픈 상황들이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몸은 현실 세계의 물리적인 공간에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정신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안에 구현된 디지털 세상,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공간에 머무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메타버스는 거대하고 엄청난 변혁임에 틀림없다.가상세계든, 거울세계든, 증강현실이든, 심지어 라이프로깅일지라도 스마트폰 속에 창조된 새로운 공간에 사람들의 정신이 머무르고 그곳에서 이전의 현실 세계에서 영위하던 일상들이 하나둘씩 실현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년 내에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인류의 삶의 터전이 아날로그 현실보다 디지털 세상에 더욱 편중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메타버스를 인류의 정신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어젠다(Agenda)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바로 버추얼 휴먼이다.

디지털 세상의 신인류, 버추얼 휴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어떤 공간에서든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디지털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과 연결되길 바라고 관계 속에서 ‘누군가의 무엇’으로서 살아가길 바란다. 그렇기에 앞으로 펼쳐질 메타버스 공간에서 마주하게 될 디지털 신인류, 버추얼 휴먼이 중요하다.

버추얼 휴먼의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방법 중 하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디지털 캐릭터와 비교하는 것이다. 디지털 캐릭터는 정해진 스토리보드 위에서만 생명력을 가지는 존재다. 겨울왕국의 엘사는 전세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이지만 영화 <겨울왕국> 1편이 종영되고 2편이 다시 상영될 때까지는 엘사 스스로 그 어떤 스토리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기 게임 속 유명한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게임이 플레이되는 동안에만 한정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는 캐릭터일 뿐 인간과 대등한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존재였다. 반면 버추얼 휴먼은 디지털 캐릭터와 달리 콘텐츠 소비자들이 ‘인격’으로 인정하는 존재다. 버추얼 휴먼은 디지털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마치 사람인 양 말을 걸고, 포즈를 취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마치 리얼 휴먼을 대하듯 버추얼 휴먼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고 두 인격 사이에서는 실제 인간들끼리와 유사한 상호작용이 발생하고 관계가 형성되며 더 나아가 팬덤으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루이(@ruuui_li)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디지털 가상얼굴로 현실 공간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메타버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버추얼 휴먼이다. 기술의 발전은 육안으로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완성도 높은 그래픽 구현을 가능케 했다.

이전까지 메타버스 서비스 속 아바타들은 3D 그래픽 기술로 제작된 애니메이션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하이퍼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수의 실사형 버추얼 휴먼들이 존재했으나 모두 육안으로 가상얼굴임을 구별할 수 있는 수준의 그래픽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과거의 디지털 캐릭터와는 전혀 다른, 실제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그래픽으로 구현된 버추얼 휴먼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다. 인격 대 인격으로, 기꺼이 팬덤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인지하고 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봐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된 로지(@rozy.gram)의 인스타그램에는 그녀의 힙(hip)한 패션과 플렉스(Flex, 과시하거나 뽐내는 일)하는 일상에 열광하는 Z세대들의 댓글이 넘쳐난다. 로지가 벤치마킹했을 것이 분명해보이는 미국의 대표적인 버추얼 휴먼 릴 미켈라(Lil Miquela)는 이미 2018년에 도널드 트럼프, BTS, 팝스타 리한나와 같은 유명인사들과 함께 TIME지가 선정한 ‘인터넷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TOP 25’에 랭크되기도 했다.

버추얼 휴먼은 디지털 공간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마치 사람처럼 말을 걸고, 포즈를 취하거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버추얼 휴먼을 하나의 인격으로 대하고 두 인격 사이에서는 실제 인간들끼리와 유사한 상호작용이 발생하고
관계가 형성되며 더 나아가 팬덤으로 발전하기까지 한다.

디지털 공간으로의 이주

현실 공간에서의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나 상호작용이 디지털 공간에서의 버추얼 휴먼과 버추얼 휴먼 간의 만남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현실 공간에서의 인간 관계와는 달리 디지털 공간에서 마주하는 버추얼 휴먼은 화려한 그래픽과 페르소나 뒤에 실제 한 명의 사람이 있는지, 고도로 숙련된 애니메이터와 마케터들이 여러 명 있는지, 혹은 첨단 AI 엔진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유튜브에서 ‘이루다 AI 누군가에게는 진짜였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찾아보면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과 AI의 만남이 현실 공간에서의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확신이 더욱 강해진다.

생각이 여기까지에 이르면 다음으로 떠오르는 어젠다는 무엇일까? 바로 디지털 공간을 현실 공간에 준하는 높은 기준으로 마주하고 필요한 질서를 잡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어스2<Earth2>는 ‘디지털 부동산 투자’라는 봉이 김선달 같은 신사업을 많은 사람이 납득하고 참여하게 만들었다. 미국 10대들이 유튜브보다 더 긴 시간 사용한다는 로블록스에서는 디지털 성희롱 피해를 입었다는 고발이 종종 보도되고 있다. 인류가 메타버스 시대에 지속적으로 번영하고 행복을 누리려면 마치 새로운 지구를 발견한 것처럼 적극적인 개척과 문명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