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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국내 최초로 ‘의료메타버스연구회’가 출범했다. ‘환자와 의사가 직접 만나야 한다’라는 기존 진료 체계를 떠올리면 의료와 메타버스의 융복합은 다소 낯설게 여겨진다. 하지만 초대회장을 맡은 박철기 교수는 “의사와 환자를 다시 만나게 하는 기술”이라는 말로 의료 메타버스의 가치를 요약했다.

AR, 디지털트윈 융복합하며 최상의 진료 이끌다

‘의료 메타버스’라는 용어는 낯설지만 관련 기술들은 이미 진료와 연구 현장에서 활용되어 왔다. 환자는 수술대에 눕고 의사는 콘솔 앞에 앉아 시행하는 로봇수술, 정신과질환이나 만성질환 치료와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디지털치료제가 좋은 예다.

지난 2월 국내 최초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이하 식약처)의 인증을 획득한 메딥프로 AR(MEDIP PRO AR)은 메타버스에 한발 더 다가서 있다. 메딥프로 AR은 인공지능(AI) 기반 디지털 트윈 기술로 구현한 환자의 해부학 구조물들을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 기술로 확장시킨 소프트웨어다. 덕분에 의사는 외과적 중재술이나 시술을 할 때 해당 부위를 열지 않고도 환자의 피부, 뼈, 뇌 내부 기관의 위치, 크기 등의 정보를 3차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를 개발한 곳은 서울대학교병원 스핀오프 스타트업 기업인 메디컬아이피(MEDICAL IP)로,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외과 박철기 교수가 자문을 맡았다.

“태블릿 PC에서 메딥프로 AR을 구동한 후 환자에게 머리에 가져다 대면 뇌의 구조와 종양의 위치 등이 3차원으로 화면에 나타납니다. 환자가 머리를 움직여도 거의 실시간으로 반영되고요. 환자의 장기 및 병변 부위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수술 경로와 위치 등을 확인할 수 있으니 환자와 의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저는 신경외과 전문의라 뇌 수술을 중심으로 말씀드렸지만, 다양한 진료과에서 활용할 수 있어요. 무엇보다 메딥프로 AR이 식약처의 인증을 획득하면서 AR 기술을 실제 의료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신경외과 전문의가 의료 소프트웨어 개발에 힘을 보탠 것은 의외의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박철기 교수는 “의과대학과 의료 현장에서는 오래전부터 관련 기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라며 신경외과 수술을 예로 들었다. 몇 mm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뇌 수술의 특성상, 종양의 위치를 정확히 찾기 위해1990년대부터 수술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자의 MRI 영상 등을 컴퓨터 화면에 정합시킨 후 수술장에 소규모 인공위성을 띄우고 기지국을 설치해 종양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며 수술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어 기술 발달에 발맞춰 종양을 포함한 환자의 뇌를 입체적으로 구현한 인공지능 의료 3D프린팅 솔루션*을 도입하는 등 수술적 비주얼라이제이션(Visualization, 시각화)을 선도하며 AR 도입에 이르렀다. 이 모든 과정의 목표는 단 하나, 환자의 몸에 최대한 해를 끼치지 않고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인공지능 의료 3D프린팅 솔루션
뇌종양 수술 시 실제 환자의 뇌 모양과 종양 위치 등을 반영한 3D 모델을 제작하는 솔루션.
2021년 4월,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 자매지인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전공의의 42.9%,
100회 이하의 수술 경험을 가진 의료진의 28.6%가 3D프린팅 모델을 확인한 후 수술 절차를 변경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시간 공유가 가능한 3D 모델링과 추출

관련 기술과 법제도 연구하며 미래의학의 길을 열어갈 것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의료메타버스연구회의 출범도 궤를 같이 한다. 의료와 첨단 기술들을 융복합 시켜 의학 교육과 트레이닝, 진료 현장 등에 두루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놓는 것이다.

“국내 의학계는 이미 VR이나 AR은 물론, AI와 3D 프린팅 기술 연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를 내왔습니다. 세계적으로 메타버스 기반 기술 선도 그룹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죠. 하지만 진료나 교육 현장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완성품을 만들려면 이 모든 것을 융합해야 합니다. 이에 전체를 아우르는 ‘미래의학연구회’를 만들기로 하고 2021년 초부터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그 과정 중 ‘미래의학’이라는 추상적인 표현 대신 ‘메타버스’라는 명확한 명칭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후 한두 달 사이, 갑자기 사방에서 메타버스라는 단어가 들려 오기 시작하더군요. 덕분에 저희 연구회에 대한 관심도 커졌고요. 그래도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연구회 발족 소식에 200여 명 가까운 이들이 몰려든 것이다. 덕분에 현재 연구회에는 서울대학교병원 모든 진료과의 교수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내 기초연구자와 의학교육 전문가는 물론 법학자와 산업계 관계자 등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연구회가 생각하는 메타버스에 대해 묻자 박철기 교수는 “의료계가 주목하는 기술을 통합한 시스템인 동시에 플랫폼”이라고 답했다. VR과 AR로 그래픽과 현실이 혼합되고, 홀로그램이나 AR글라스를 이용해 환자를 진단하는 환경이 마련될 때 진정한 ‘의료 메타버스’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 발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3D 공간을 빠르게 스캐닝 하는 기술과 스캔한 데이터를 3D로 재구성하는 볼륨 렌더링(Volume Rendering)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컴퓨팅 기술 고도화 등이 그것이다. 기술 발전에 따른 제도나 법령도 마련되어야 한다. 실제로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법·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활용되지 못하는 부분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메타버스 수술’이다.

“현행 의료법상 원격의료가 금지되어 있어서 의사는 환자가 있는 수술장 근처에서 콘솔로 로봇수술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만 보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해요. 부산에 있는 환자를 서울에 있는 의사가 수술할 수도 있고요.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의사들이 한 사람의 환자를 동시에 수술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가상의 공간에서 한자리에 모인다는 점에서 ‘메타버스 수술’이라고 부를 수 있죠. 그밖에 기술이 발전하면서 구현과 관련한 법·제도적 문제가 생겨날 텐데, 이를 한발 앞서 제안하는 것도 우리 연구회의 중요한 역할이 될 것입니다.”

의사와 환자를 다시 만나게 할 의료 메타버스

메타버스 특히 의료 메타버스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에도 귀를 열고, 거부감을 줄이는 것 역시 의료메타버스연구회의 목표다. 실제로 의료 메타버스와 관련해서는 주요 대형병원들로 환자가 몰리는 의료집중화, 의사와 환자가 대면하지 않고도 진료와 진단, 시술이나 수술 등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겠냐는 등의 우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런데 현재 보편화된 의료 기술들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X-레이나 MRI 데이터를 컴퓨터로 옮길 때는 ‘해상도 떨어지는 모니터로 보면 의료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라는 반발이, 전자의무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 EMR) 도입 시기에는 ‘손으로 쓰면 더 빠르다’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며 구축된 방대한 의료 데이터베이스는 의료적 판단은 물론 의학 전체의 발전을 이끌었다. 의료 메타버스도 마찬가지다. 잘만 활용하면 환자의 편의성, 진료의 질 향상은 물론 사회적 비용 절감 등으로 이어질 수 있고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방향으로 의학이 발전할 수 있다. 그중 박철기 교수는 ‘의사와 환자의 만남’에 주목한다.

“2000년대 이후, MRI나 X-레이 등의 영상, 차트 등 환자의 모든 정보가 전산화됐습니다. 때문에 의사는 진료실에서도 환자가 아닌 컴퓨터 모니터를 보면서 진료와 처방을 하게 됐죠. 그러니 환자가 ‘모니터 속’으로 들어간 셈입니다. 반면 메타버스의 발전은 환자들을 모니터 바깥으로 불러내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의사가 AR 글라스를 착용하면 환자를 직접 보면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고 그 장면이 다시 데이터로 저장될 수도 있죠. 이번에 식약처 허가를 받은 메딥프로 AR 같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의사와 환자를 다시 만나게 하는 기술’이 실현되기까지 아직 갈 길은 멀다. 기술 발전은 기본, 메타버스를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의료에 융복합 시키고 세간의 거부감을 줄여 나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의료메타버스연구회의 출범은 출발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근차근 준비하며 때를 기다리겠다”라는 박철기 교수의 말은 메타버스로 열어갈 미래의학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