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잠재력까지

모두 끌어내라!

스포츠에 부는

테크(Tech) 바람

글.안중현 조선일보 기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대한 기억은 각자가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마르세이유의 치욕’이라 불리는 네덜란드전 5대0 대패를 떠올리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만 19세에 월드컵에 출전한 이동국 선수를 떠올릴 것이다. 필자는 이임생 선수의 ‘붕대 투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마가 깨져 피가 나는 상황에서도 경기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의료진에게 붕대를 빨리 감으라고 의료진을 재촉하던 그의 모습 말이다. 98년 월드컵 이후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스포츠에서 투혼이나 정신력을 제1의 덕목으로 치는 이는 드물다. 최첨단 기술이 빠른 속도로 스포츠에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력 향상의 첨병, 스포츠 테크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진두지휘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세계 최강팀의 수준을 100으로 봤을 때 한국 대표팀의 기술은 85점, 체력은 50점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이 유럽 정상급 선수보다 기술은 좀 달릴지 몰라도 체력만큼은 뒤지지 않을 것이란 믿음과는 상반된 결과였다. 히딩크 감독의 진단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빅데이터 분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히딩크 감독은 훈련에 앞서 영상 촬영 포인트를 꼼꼼히 챙겼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의 움직임을 보다 자세하게 영상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촬영된 영상은 컴퓨터에 입력돼 데이터로 저장됐고, 코칭스태프는 이를 분석해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런 분석에 근거해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체력을 끌어올리는 ‘파워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선수들의 체력은 향상됐고, 이는 ‘월드컵 4강 신화’의 밑바탕이 됐다.
축구에서 스포츠 테크가 널리 확산한 계기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이 빅데이터의 도움을 톡톡히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당시 독일은 세계 최대 기업용 소프트웨어업체 SAP가 개발한 ‘매치 인사이트’라는 프로그램을 활용해 선수의 위치와 속도 등 초당 수천 개씩 쏟아지는 데이터를 확보해 경기 전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독일 월드컵 대표팀의 12번째 선수는 빅데이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제 축구에서 전자성능추적시스템(Electronic Performance & Tracking System, 이하 EPTS)은 더 이상 낯선 장비가 아니다. 국가대표팀과 프로축구팀은 물론, 아마추어 축구팀도 이를 사용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EPTS는 선수의 유니폼 안에 입는 조끼에 붙어 있는데, 선수의 활동량과 자세 변화, 스프린트 속도, 피로도 등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역전 골을 넣고 유니폼을 벗는 세리머니를 펼친 황희찬(울버햄프턴)이 입고 있던 검은색 조끼에 EPTS가 달려 있었다.
축구뿐만 아니다. 미 프로풋볼(NFL) 선수들은 어깨에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무선 주파수 식별장치) 태그를 부착하고 뛴다. RFID가 경기 중 선수 위치·속도·이동 거리 등 260여 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인공지능(AI)이 이를 분석한다. 메이저리그 30개 경기장에도 12대의 고해상도 카메라가 모든 선수와 공의 움직임을 1초에 30번씩 추적하는 ‘호크아이(Hawk eye)’ 시스템이 설치돼 있다. 이를 통해 투수의 손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공의 속도, 공이 꺾이는 각도 등 60개의 데이터를 순식간에 수집한다.
감(感)과 경험에 의존하며 승부를 겨루던 과거에서 벗어나, 경기 데이터를 AI가 분석해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는 시대가 온 것이다. 첨단 기술이 스포츠 분야를 움직이는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스포츠 테크 스타트업에 막대한 투자금이 몰리고, 관련 산업 규모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마켓US는 지난해 159억 달러 규모였던 세계 스포츠 테크 시장이 연평균 18%씩 성장해 2032년에는 792억 달러(100조 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스포츠 테크와 함께라면 경기 관람도 더욱 즐겁다

스포츠 테크는 경기를 관람하는 팬들도 즐겁게 해준다. 스페인 프로축구리그 ‘라 리가’가 도입한 인텔의 ‘트루뷰’라는 기술은 경기장 둘레에 38대의 고성능 카메라를 설치해 30초 길이의 3차원 영상을 실시간으로 만들어 낸다. 이 영상들은 모바일 기기로 중계를 보는 사람이 시점을 바꿔가며 여러 방향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득점 장면이나 중요한 상황을 다양한 시점에서 재확인할 수 있다. TV로 경기를 보던 시대에서 모바일로 경기를 보는 시대로 바뀌면서 스포츠 중계 분야 기술도 진화한 것이다.
미 프로농구(NBA)는 2020년 12월 코트 내 선수 움직임을 분석하고, 이를 팬들에게 전달하는 ‘코트옵틱스’ 라는 플랫폼을 도입했다. 경기장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가 경기당 1000만개 가량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AI가 분석해 어떤 선수가 더블팀(두 선수가 공을 가진 한 선수를 집중적으로 수비하는 것)을 많이 받는지와 같은 예전에는 알기 어려웠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팬에게 전달한다.
스포츠 테크는 정확한 판정으로 경기 수준도 끌어올린다. 지난해 카타르월드컵 조별리그 이란과 웨일스의 경기에서 이란의 사르다르 아즈문의 패스를 받은 알리 골리자데가 웨일스의 골문을 갈랐다. 이란 선수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곧 오프사이드가 선언됐다. 비디오 판독 결과 아즈문의 패스를 받기 전 골리자데의 어깨가 웨일스 수비수보다 살짝 앞서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정확한 판정은 심판이 눈으로 보기 어려운 찰나의 순간을 기술을 활용해 판독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카타르 월드컵 공인구 ‘알 리흘라’에 탑재된 관성측정센서(Inertial Measurement Unit, IMU)는 공의 이동 속도와 방향, 중력, 가속도 등의 데이터를 모아 비디오 판독실로 전달했다. 여기에 경기장 지붕에 설치된 12개의 카메라가 선수들의 발끝, 무릎, 어깨 등 신체 부위 29곳의 위치데이터를 초당 50번씩 수집해 선수의 정확한 위치정보를 파악했다. 이런 데이터들을 모아 오프사이드 판독 시스템(SAOT)이 정확한 판정을 이끌었다.
‘오심도 야구의 일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심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야구에서도 컴퓨터가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을 하는 시대가 가까워지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2019년 제휴를 통해 독립리그인 애틀랜틱리그에서 처음으로 로봇 심판을 테스트했고, 2021년 로봇 심판을 마이너리그 싱글A에 도입했다. 작년엔 트리플A 일부 경기에도 로봇 심판을 테스트했다. 메이저리그도 로봇 심판 도입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테니스, 농구, 배구에서도 공이 라인 밖으로 나갔는지를 확인하는 호크아이 시스템을 통해 공정성을 높이고 있다.

첨단 기술이 스포츠 분야를 움직이는 중심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스포츠 테크 스타트업에 막대한 투자금이 몰리고, 관련 산업 규모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마켓US는 지난해 159억 달러 규모였던 세계 스포츠 테크 시장이 연평균 18%씩 성장해 2032년에는 792억 달러(100조 원)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한다.

‘기술 도핑’ 논란… 그래도 스포츠 테크는 진화한다.

스포츠에 기술이 더해지면서 일각에서는 ‘기술 도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약물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기술로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케냐의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는 2019년 비공식 경기에서 1시간 59분 40초 만에 42.195㎞를 주파해 인간의 한계로 여겨지던 2시간 벽을 깼다. 당시 킵초게는 나이키가 특별 제작한 운동화를 신었는데, 밑창 중간에 탄소섬유로 만든 판이 3개 들어 있어 마치 스프링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운동화보다 뛰는 힘을 10%가량 높여주는 만큼 이 신발이 없었다면 2시간을 깨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란 지적이 있다. 이후 세계육상연맹은 도로에서 펼쳐지는 마라톤, 경보 경기에서 밑창 두께를 40㎜ 이하로 하고, 탄소섬유 판을 1개까지만 넣도록 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수영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수중 저항을 크게 줄인 폴리우레탄 소재의 전신 수영복 덕분에 세계 신기록이 양산되기도 했다. 이에 세계수영연맹(FINA)은 2010년부터 국제대회에서 전신 수영복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고대올림픽 경기에는 남자들만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경기 참가는 물론 관전조차 금지됐었다. 또 모든 선수는 옷을 입지 않은 채 경기를 펼쳤다. 경기종목도 처음엔 단거리 달리기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스포츠 경기에서 성별의 벽이 허물어졌고, 다양한 디자인의 경기복이 화제가 된다. 경기 종목도 다양해졌다. 최근엔 스포츠의 개념이 확장되면서 바둑이나 체스 같은 ‘마인드 스포츠’나 리그 오브 레전드 등 ‘e스포츠’가 아시안게임 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면 변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온갖 산업에 기술이 접목돼 빠르게 발전하는데, 스포츠 분야라고 예외일 순 없다. ‘전자식 페이스메이커’로 육상 선수들의 신기록 달성을 도왔던 스타트업 웨이브라이트의 운영 책임자 브램 솜은 “인간이 맨발로 달리다가 신발을 신었고, 이후에 스파이크로 진화하지 않았느냐”면서 “지금은 웨이브라이트가 있지만 50년 후에는 (그보다 성능이 향상된) 또 다른 장비가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스포츠에 기술이 더해지면서 일각에서는 ‘기술 도핑’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약물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과 기술로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수영에서는 수중 저항을 크게 줄인 폴리우레탄 소재의 전신 수영복 덕분에 세계 신기록이 양산되기도 했다. 이에 세계수영연맹(FINA)은 2010년부터 국제대회에서 전신 수영복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