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전자투표는 종이투표가 갖는 물리적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투표 데이터의 입력, 보관, 출력 등 각 단계별 해킹의 위험과 불안정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투표와 개표 시스템 개발자가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염려도 완벽하게 해결하기 힘들다.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블록체인이 급부상하고 있다. 분산 원장과 해시 함수 등 데이터 무결성과 개방성을 핵심으로 하는 블록체인 기술이 유권자의 권리 행사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안전하고 편리한 기술이 될 수 있을까? 종이 투표와 기존 전자 투표,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의 투표 시스템 사례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가능성을 같이 고민해보자.

세계 최초의 전자 투표,
에스토니아 사례 읽기


투표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핵심 수단이다.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평등하게 표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치가 투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받는 사람 없이 국민 모두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현행 종이 투표 시스템은 그 물리적 특성 때문에 투표 과정에서 여러 한계를 보이고 있다. 유권자가 해외에 머무르거나 장애가 있어서 이동이 불편한 경우, 투표장 접근이 어렵고 설사 투표장에 가더라도 온전한 투표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거리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부재자 투표 제도가 있긴 하지만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또한 종이 투표는 개표 과정에서도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필요하고 사람이 손수 개표하다 보면 분실이나 조작 등 각종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종이 투표의 한계를 극복하고 효율성과 안전성, 투명성의 극대화를 목표로 도입된 방식이 바로 전자 투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온라인을 통해 유권자가 언제 어디서든 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아이디어가 반영된 결과다.
에스토니아는 전자 투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국가다.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전국 규모의 지역 선거에 전자 투표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투표를 온라인으로만 했던 것은 아니고 종이 투표와 함께 유권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식 중 하나였다. 당시 유권자 수는 약 105만 9,000명 정도였는데 정확히 9,317명이 전자 투표를 해서 1.85%의 참여율을 보였다. 에스토니아가 이렇게 일찍 전자 투표를 도입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2002년 도입한 전자주민등록 시스템이 큰 역할을 했다. 15세 이상 국민은 의무적으로 이 시스템에 등록이 되었고, 덕분에 온라인으로 유권자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둘째, 에스토니아의 작은 인구 규모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에스토니아는 핀란드와 러시아 국경 사이에 위치한 북유럽 국가로 총인구가 2020년 현재 약 132만 명밖에 안 된다. 서울 송파구와 강서구 주민을 합친 정도인 셈이다.
미국 애리조나주도 전자 투표 역사에서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에서 전자 투표를 처음으로 시도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애리조나주는 예비 선거(Primary election)를 위해 전자 투표를 도입했다. 그러나 당시 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밀레니엄 버그 즉 Y2K 사태가 불거지면서 전자 투표 결과에 문제점을 야기했다. 미시간주도 2004년 예비 선거에 전자 투표를 첫 도입한 역사를 갖고 있으며 약 5만 명의 유권자가 참여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으로 전자 투표는 종이 투표의 단점을 보완하는 시스템으로 자리매김 하는 듯 했으나 해킹과 시스템 불안정 등의 문제로 답보 상태에 놓였다.



에스토니아는 전자 투표를 이야기할 때빼놓을수없는 대표적인 국가다.
지난 2005년 세계 최초로 전국 규모의 지역선거에전자투표 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미국방부가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가 철회한 ‘Secure Electronic Registration and Voting Experiment(SERVE)’가 대표적이다.
해외에 거주하는 미국 국민이나 군인들이 온라인으로 투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으로 약 620만 달러(한화 75억 원)가 소요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투표권 한 개당 약 7만 3,809 달러가 들어가는 셈이었다고. 이 계획을 철회한 결정적 이유는 시스템을 개발하는 회사들 스스로 정치적 성격을 가진 단체로 발전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이 회사들은 공정한 시스템 개발을 촉진한다는 명분으로 단체를 구성했는데 그 움직임 자체가 공공성이나 객관성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블록체인, 어떻게 투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블록체인이 전자 투표 시스템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실제 사례를 살펴보기 전에 블록체인 기술 자체부터 들여다보자. 블록체인의 핵심은 ‘분산 원장(Distributed ledger)’과 ‘블록(Block)’이라는 개념이다. 본래 회계 용어의 하나인 ‘원장’은 거래 기록을 적어 놓는 수첩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특정 네트워크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디지털화 된 거래 기록을 복제, 공유, 동기화 해서 동일한 원장을 각자가 분산해서 나눠 가지게 된다는 개념이 바로 분산 원장이다.
이 분산 원장의 개별 정보는 ‘블록’의 형태로 저장하며 각 블록은 거래 시간, 거래 참가자 등 거래 정보를 담고, 각 블록은 ‘해시 함수(Hash function)’라는 암호화 기술을 통해 연결된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거래 기록을 임의로 조작하거나 추가할 수 없게 되어 거래의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된다. 투표의 맥락에서 보자면 거래 기록은 다름 아닌 특정 유권자가 특정 후보에게 표를 줬다라는 기록이 되고, 결과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투표를 객관적으로 비밀리에 치를 수 있게 된다.
블록체인 기술의 장점을 전자 투표에 응용한 대표적 회사로 보아츠(Voatz)를 들 수 있다.이 회사는 2016년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설립되었는데 블록체인 기반의 모바일 투표 시스템 개발을 주력으로 2019년까지 총 31건의 투표 이벤트에 투입됐다. 유권자가 보아츠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생체인식이 필수다. 이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 받은 유권자는 자신의 전화번호와 함께 사진이 들어간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을 셀카와 함께 입력한다. 그럼 이 애플리케이션은 안면인식 기술과 선거인명부 대조를 통해 유권자의 신원을 파악한다.
종이 투표를 할 때 실제 투표소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본인 확인을 거친 뒤 선거인명부에 서명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렇게 신원 파악이 끝난 유권자는 지문인식을 거쳐 비밀 토큰을 받게 되고 이를 활용해 투표를 마칠 수 있다. 2018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는 해외 거주자들을 위해 중간 선거에 이 기술을 활용했고 31개국에서 총 144명의 유권자가 참여했다.
한편, 2016년 미국 유타주에서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를 뽑기 위해 ‘Smartmatic-Cybernetica Internet Voting Centre of Excellence(Smartmatic과 Cybernetica가 세운 조인트벤처)’의 블록체인 투표 시스템을 활용한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이 기술이 도입된 첫 사례로 약 2만 4,000명의 주민들이 세계 각지에서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전자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사전 등록이 필수였는데 등록한 사람 중 약 90%가 투표에 참가함으로써 상당히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 50대와 60대가 다수를 차지했다.

투표의맥락에서보자면거래기록은다름아닌특정유권자가특정 후보에게 표를 줬다라는 기록이 되고, 결과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투표를 객관적으로 비밀리에 치를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문제들

블록체인 기술은 전자 투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듯 보이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기술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해소되면 보다 완벽한 시스템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
첫 번째, 무엇보다 전자 투표를 하는 유권자의 디바이스(핸드폰, 컴퓨터 등)가 해킹될 가능성이 있다. 유권자의 디바이스가 다른 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그 결과 대리 투표를 한다든지, 특정 후보에게만 표가 몰리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디바이스 자체는 블록체인 기술로는 통제하거나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다. 특히 해외 거주자들의 경우 네트워크 상태나 디바이스 스펙 등이 각각 달라 기술적으로 이에 대응한다는 것이 이론처럼 쉽지 않다.
두 번째, 시스템 자체를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객관성과 투명성에 대한 우려가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선거 절차를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으며 투표와 개표 과정을 참관인이 직접 감시한다. 그러나 전자 투표는 그렇지 않다. 개발자가 어떻게 시스템을 개발하느냐에 따라 오류, 조작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이는 언제든 정치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기 쉽다. 유권자가 아닌 개발자가 과도한 결정 권한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며, 결과적으로 투표의 객관성과 투명성 그리고 유권자의 비밀성이 침해 받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세 번째, 블록체인 기술은 전자 투표 도입의 취지와 달리 기술 격차를 일으킬 수 있다. 즉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이 마련된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는 시스템이 될 우려가 있다. 전자 투표는 투표소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개발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는데, 블록체인 기반의 투표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디바이스가 필요하고, 사전 등록이나 생체인식과 같은 부가적인 절차가 뒤따른다. 개표하는 입장에서도 추가적인 별도의 시스템 도입이 필수적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여러 장점을 갖고 있고 응용 분야도 미래 지향적이지만, 투표라는 이벤트를 위해서는 기술뿐 아니라 사용자와 업계, 정책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상당히 복합적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전자 투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듯 보이지만 아직까지 완벽한 기술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들이 해소되면 보다 완벽한 시스템을 갖출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