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페루 마추픽추의 해돋이를 감상하고, 저녁에는 파리 최고의 아이스크림 전문점에서 레몬 소르베를 직접 만들어본다. 허무맹랑하게 들린다고? 랜선투어라면 이 모든 게 가능하다.

텅텅 빈 2020년의 공항

매년 이맘때면 더위에 녹초가 된들 마음만은 즐거웠다. 없는 시간 짜내어 온 가족이 일정을 잡아놓은 여름휴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여행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가장 긴 휴식을 만끽하기 위해 으레 해외로 목적지를 잡았다. 때로는 이미 가본 곳이라 설레지도 않았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며 심드렁한 마음으로 짐을 꾸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성수기 바가지는 쓰기 싫어서 일찌감치 왕복 항공편까지 사놓았는데…. 코로나19 바이러스 창궐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수많은 나라를 다니며 여행에 관련된 갖가지 사건·사고는 다 겪어본 이들도 아마 이런 상황은 처음일 테다.
자잘하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기차를 놓치는 일은 있었어도, 방문 예정 도시에서 사람 목숨이 하릴없이 스러지고 있다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지금 여행이 문제가 아니라는 자각이 들 무렵, 국내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고 각국 공항은 입출국을 강력히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아마 어느 시점까지는 8월 말에라도 나갈 수 있을 거라며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을 테다. 생업을 위한 비즈니스 여행조차 불가능하다는 보도와 함께 마음을 접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2020년의 여름은 을씨년스러워진 공항 풍경과, 그에 대비해 북적대는 집안 풍경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여하튼 무기한 휴교와 재택근무로 온 국민이 실내에서 머물게 되면서 급격한 생활의 변화가 찾아왔다. 초반에는 세기말적인 암울함만이 감돌던 시장에도 몇몇 트렌드와 산업이 고개를 들었다. 일단 비대면 접촉을 뜻하는 ‘언택트(Untact)’ 추세가 더 공고해지는 모습이었는데, 국가 방침이 ‘거리 두기’였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택배도 직접 건네받지 않고, 점심시간 들르는 식당도 부쩍 키오스크를 설치한 곳이 많아졌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도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주문 시스템을 갖추니, 그야말로 사람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어진다. 게다가 가족 단위로 나들이 겸 들리던

마트, 쇼핑센터, 도서관 등이 모두 폐쇄된 탓에 모든 걸 인터넷으로 해결한다. 아침 식사는 새벽배송으로 해결하고, 집중력이 떨어진다며 꺼렸던 인터넷 강의를 듣고, 뜬금없이 유튜브를 보며 홈트레이닝을 시작하는 등등. 존재는 알았지만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았던 온라인 서비스에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궁하면 통한다,
랜선투어의 탄생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지거나 배달 음식만 신나게 사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금세 질리기 마련이다. 친밀한 관계를 피하고 혼자 무엇이든 해내는 문화가 대세였는데 정작 코로나 시국이라는 ‘강요된 언택트’가 닥치니 마음이 달라진다. 오히려 서로 이어지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재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주목받은 신경향이 ‘온택트(Ontact)’다. 비대면의 한계를 소통 및 온라인 연결로 메우는 개념인데, 불황 타개를 모색하던 여행 업계도 발 빠르게 적용했다. 어차피 오프라인 고객을 모을 순 없는 데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나게 될 지조차 알 수 없다. 여객 운송이 전면 중지된 상황에서 화물 운송 폭증으로 의외의 활로를 찾은 항공사들처럼 솟아날 구멍은 없을까? 여행사나 각국 관광청은 바로 온택트에서 힌트를 찾았다. 본격적 랜선투어의 탄생이었다.
말 그대로 랜선투어는 온라인상에서 즐기는 관광이다. 여행 콘텐츠를 다루는 사이트는 무수히 많고, 관련 동영상도 이미 많이 접했을지 모른다. 언뜻 생각하면 이 주제를 다루는 <세계테마기행>, <걸어서 세계 속으로> 등의 TV 프로그램과 비슷하게 여겨진다. 아예 ‘랜선여행’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더 짠내투어> 같은 여행 예능도 있으니 그저 수동적으로 영상을 감상하는 모습만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공간정보와 인터랙티브 미디어를 가미한 최근의 랜선투어는 훨씬 다양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 언택트와 온택트를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체험 미디어’의 유무다. 그저 여행 카페에서 정보를 얻고 유튜브에서 해당 도시 풍광을 감상하는 정도라면 랜선투어라고 부르기 미흡하다. 원하는 도시에서도 정확히 어떤 지점을 보고 싶은지 고르고, 입체적인 경험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정밀한 공간정보가 필수다. 인간의 활동무대인 지구 곳곳의 지형 및 위치를 여러 형태로 구현한 데이터베이스이므로 여행 산업에 무궁무진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여행자는 자유로이 취사선택하며 거닐면 그만이다. 아직 초기 단계인 터라 이용자로서는 대리만족, 콘텐츠 제공자로서는 수익 모델 아닌 마케팅 수단 정도에 머무르기는 한다. 그래도 현재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의 발전 속도로 보아 언젠가는 정착할 플랫폼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이 새로운 투어를 누려보는 것일 테다.

방구석 와인투어는 어떤가요

아무래도 이 분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은 관광 수입 감소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들이다. 프랑스 관광청(kr.france.fr/ko)은 ‘Stay Safe’라는 카피와 함께 랜선투어를 홈페이지 전면에 내걸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곳이니만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프랑스의 보물 45곳’, ‘노르망디 지역의 아름다운 도시’, ‘랜선으로 떠나는 클로드 모네투어’ 등 제목만 봐도 황홀한 투어를 마련해 놓았다. 압권은 각 지방 포도원으로 떠나는 여행. 항공사진으로 촬영한 너른 포도원을 서서히 확대해 파노라마로 음미하다 보면 와인 생각이 절로 난다. 아예 일정을 잡아 이번 주는 부르고뉴, 다음 주는 보르도 등 차례차례 방문해 봐도 좋겠다.
캐나다 관광청(kr-keepexploring.canada.travel)은 최근 기술 동향을 꽤 잘 파악한 모양새다. 3D 촬영 기술로 박물관 전체 공간을 옮겨놓은 ‘바이타운(Bytown) 박물관 가상투어’는 흡입력 있는 체험을 제공한다. 사각지대 없이 전시물, 작품 설명, 심지어 1층 매점에 놓인 냉장고 내용물까지 보인다. 광활한 자연 풍광도 시야를 탁 트이게 해주고, 줌(Zoom) 화상회의를 위한 배경화면까지 만들어 내려 받을 수 있게 해놓았다.

두바이는 관광청 홈페이지와는 별도로 본격적인 인터랙티브 시티투어 사이트인 ‘두바이 360(dubai360.com)’을 선보였다. 828m 높이의 부르즈 칼리파 빌딩에서 촬영한 두바이의 낮과 밤을 타임랩스로 보여주는데 입이 떡 벌어진다. 도심 위주의 풍광이긴 하나 외곽 지역도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으니 자주 들러볼 만하다. 이 서비스를 위해 투입된 자료를 보면 랜선투어를 위해 얼마나 방대한 공간정보가 필요한지 실감 난다. 헬리콥터와 전철에 장착해 촬영한 8테라 픽셀 이상의 초고화질 이미지와 영상, 타임랩스 파노라마를 위한 50만 장의 사진은 그중 일부일 뿐이다.
국내 여행의 경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보니 온라인에서 다양한 경험을 만나기는 녹록치 않다. 다만 외출은 여전히 부담스러우므로 공공시설이나 자치 단체들이 속속 랜선투어를 마련하는 중이다. 서울숲 컨서번시(seoulforest.or.kr)는 유튜브 ‘서울그린트러스트’ 상에 일반인이 입장할 수 없는 서울숲 비공개구역을 공개했다.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구석구석(korean.visitkorea.or.kr)’은 고정 코너로 ‘This week 랜선여행’을 마련해 다채로운 시도를 하는 중이다. ‘온라인 도슨트와 떠나는 여행’도 완성도가 높은데, 예를 들면 청와대 내부를 알찬 설명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그냥 휙 둘러보고 나오는 실제 방문보다 문화생활로는 더 풍족한 느낌이다.

진취적인 클릭, 진화하는 클릭

사실 위에 소개한 투어만 다 시도해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지라,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코로나19 백신이 개발되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다. 하지만 패키지여행보다 발 닿는 대로 떠나는 자유여행 선호자라면 이 또한 ‘짜인 프로그램’인지라 아쉬울 수 있다. 2D, 3D, VR, 항공 등 다각도의 공간 이미지에 특화된 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면 말 그대로 아무 데나 갈 수 있다. ‘에어파노(airpano.com)’는 전 세계 핫스폿을 360도 사진, 동영상, 360도 VR로 보여준다. 3D 안경을 착용하면 마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현실감을 준다. 동영상을 볼 때는 스마트폰을 움직이는 방향대로 각도가 바뀌므로 마치 직접 영상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것 같다. ‘구글 지도(google.co.kr/maps)’는 ‘스트리트 뷰’에 프로 못지않은 사진과 동영상이 올라오는 데다 개인 맞춤 여정까지 짤 수 있어서 여행하는 재미를 오롯이 누릴 수 있다. 박물관과 갤러리, 문화유산을 위주로 둘러보기 원하면 ‘구글 아트 앤 컬쳐(artsandculture.google.com)’를 권한다. 사실 많은 국가의 사이버 박물관 투어가 이 서비스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매번 외부 링크로 우회하느니 미술품 관람 전용으로 이용해보면 좋을 듯. 돌아다니는 여행보다는 골목 어귀에 앉아 조용히 도시를 관조하는 유형엔 ‘어스캠(earthcam.com)’도 괜찮다. 고정된 카메라가 뉴욕이면 브로드웨이, 리우데자네이루면 해변 하는 식으로 하염없이 실시간 영상을 송출한다.
이렇듯 랜선투어도 이용자의 개성에 따라 점차 세분되면서 수많은 가능성을 내놓는 중이다. 지금은 사전준비처럼 접하지만, 머지않아 사람들은 여기서도 오프라인 여행을 능가하는 재미와 의미를 찾아낼 것이다. 통합 고정밀 공간정보가 ‘자율주행’이라는 상상 속의 일을 구현해냈듯이, 경이로운 여행이 지금 가상현실에서 움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