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무의미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 만들어진 협동조합 ‘무의’. 장애인 이동권 콘텐츠를 제작하는 무의는 휠체어에 의지해 세상을 감각해야 하는 모든 장애인들이 누구의 도움 없이도, 홀로 자유롭게 온 세상을 활보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무의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홍윤희 씨를 만나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알아본다.



홍윤희
장애인 이동권 콘텐츠 제작협동조합 ‘무의’ 이사장

‘무의(無意)’에 대한 소개와 함께 현재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저와 하버드대 생 김건호 씨가 함께 만든 단체입니다. 건호 씨는 휠체어를 사용해야 하는 장애인인데 예전에 미국에서 혼자 20개 주를 직접 횡단하며 그 체험을 담은 <20 States on Wheels>란 책을 출간한 바 있어요. 그 책을 보고 저는 딸 지민이와 스토리펀딩을 통해 ‘지민이의 그곳에 쉽게 가고 싶다’라는 유튜브 비디오 시리즈를 만들었고요. 제 딸 지민이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인데요, 이런 일들이 인연이 되어 건후 씨를 만났고 무의라는 협동조합을 만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스토리펀딩으로 모은 비용을 활용해 지하철 환승지도를 제작했어요. 2016년에는 환승지도 1.0 버전을, 2017년에는 2.0 버전을 만들었죠. 그동안 장애인 이동권을 고민하는 단체는 많았지만 대부분 일회성에서 그쳤다는 점이 아쉬웠기 때문에 저희는 지도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하는 것도 목표였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고 할 때 보통은 어려운 기술을 언급할 때가 많은데, 무의의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는 지도의 개념은 매우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현재 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있죠. 계단을 올라갈 수 있는 휠체어라든지, 웨어러블 컴퓨터의 진화된 버전인, 일명 ‘아이언맨 다리’로 불리는 입고 걸을 수 있는 로봇 등이요. 하지만 이런 기술은 저희 같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무엇보다 비싸잖아요.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건 먼 미래에 사용할 수 있는 값비싼 기술이 아니라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편리성이에요. 휠체어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보다 계단 옆에 경사로를 만들면 문제가 더 쉽게 해결되잖아요. 가까운 곳에서 바꿀 수 있고 또 해결할 수 있는 지점들을 살펴보자는 게 이 지도의 핵심이에요. 저희가 만든 지도는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림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아주 쉬운 그림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몇 미터를 가면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고,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간략하고 명료하게 적혀있어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환승지도를 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한데요. 환승지도를 제작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사실 처음부터 환승지도를 제작할 생각은 없었어요. 제 딸이 지하철 타는 것을 좋아하는데 같이 다니다 보니 장애인들은 지하철 환승 시마다 불편을 겪게 되더라고요. 환승도 불편한데 역무원도 방법이나 루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엘리베이터 안내는 부실했어요.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리프트를 타야 하는데 그건 장애인들에게 매우 수치스러운 이동수단이에요. 처음에는 엘리베이터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안내 스티커만이라도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하철이 공공장소이기 때문에 스티커를 붙이는 건 불법이더라고요. 안되겠다 싶어 지도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거예요. 지도를 제작해보니 결국 우리나라 장애인 이동권의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프라가 너무 열악하다는 데 있더라고요. 길 자체도 매우 불편하게 되어 있어요. 인도와 차도의 턱이 좁고 가파를 뿐 아니라 1층에 위치한 가게들도 전부 턱이 있어서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죠. 예전에 딸과 함께 하와이에 갔는데 100년 된 미술관도 턱이 없더라고요. 어쩌면 이렇게 장애인 접근성이 좋은지 물어보자 “It’s law”라며 당연한 듯 말하더라고요. 우리나라는 저상버스 비율도 굉장히 낮아요. 그나마 서울이 많다고 하는데도 약 30% 수준이죠. 결국 인프라 자체가 부족하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환승지도를 제작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환승지도인 만큼 지하철 내부를 조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애를 많이 먹었어요. 사진을 찍고 있으면 허가를 받고 오라며 가로막더라고요. 또한 지하철이 약 6개 업체에 의해 나눠서 관리되고 있는데 환승이 많은 지하철 역의 경우 서로 관리하는 구역의 교차로는 결국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곳이 되더라고요. 실제로 고속터미널 역에서 황당한 경험이 있었어요. 딸과 함께 이동하다가 환승을 위해 리프트를 타려고 하는데 ‘고장’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 밑에는 ‘고속터미널 역장’이라고만 쓰여 있었죠. 당황스러워 전화를 했더니 저더러 어디 있냐고 묻는 거예요. 이유를 물으니 계단 밑에 있는지 위에 있는지에 따라 제가 연락해야 하는 관리소가 다르다고 답하는 거예요. 페이스북에 이 이야기를 쓰고 다음날 항의를 많이 받았죠.



많은 어려움 속에서 환승지도를 제작하셨네요. 이러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어떤 공간정보 기술을 활용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 공간정보 기술의 발전이 장애인들에게 어떤 이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처음엔 실내 내비게이션 기술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현재로서는 비용 대비 효과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다음 기회로 미뤘고요. 그러고 나서 서울시 실내지도과로부터 보유한 실내공간 DB를 받아 활용했습니다. 공간정보 기술이 발전하면 장애인들에게도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특히 실내공간에 대한 공간정보 기술이 발전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예를 들어 지하철 내 화장실을 찾을 때도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여자 혹은 남자 화장실이 왼쪽에 있는지 오른쪽에 있는지 혼돈될 때가 많은데 만약 실내공간의 공간정보 기술이 발전한다면 이러한 혼란도 해결되지 않을까요? 내가 있는 공간에서 드론이나 비콘 등의 기술을 활용해 음성으로 안내를 해준다면 화장실에서 봉변을 당하는 일은 없겠죠. 사실 장애인들은 이런 일을 한 번 겪으면 충격이 심하게 남아 지하철 내에서는 생리 활동을 극단적으로 참아버리는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거든요.

앞으로 초등학교 장애학생을 위한 지도 제작을 계획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초등학교 장애학생을 위한 지도예요. 요즘은 초등학교에서 현장체험 학습이 많은데 해당 장소까지 초등학교 장애학생이 스스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를 만드는 거죠. 제 딸이 지금 중학교 2학년인데 초등학교 때를 생각해보면 소풍날이 가장 힘들었어요. 저희 딸은 이동이 불편하니 다른 차를 타고 가거나 지하철을 타더라도 엘리베이터 출구가 다르기 때문에 선생님과 먼저 출발하는 게 보통이었죠. 하지만 딸은 친구들과 함께 가고 싶으니까 울면서 “친구들과 못 가면 안 가”라고 말하고 저는 달래고, 이 과정이 매번 소풍 때마다 반복되었어요. 만약 이러한 지도가 생기면 미리 계획을 짤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예를 들어 경복궁에 간다고 할 때 비장애인은 3번 출구 로 내려서 5분 걸으면 되지만 휠체어로 가려면 1번 출구로 내려서 15분을 돌아가야 합니다. 이걸 미리 알고 있다면 소풍 장소까지 가는 계획을 세울 때 도움이 될 수 있잖아요. 궁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 주로 현장체험 학습을 자주 가는 장소 위주로 지도를 제작하려고 합니다.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고 계시네요. 이사장님께서 앞으로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제가 없어도 제 딸이 지하철을 아주 편하게 탈 수 있는 세상이요. “넌 휠체어를 타니까 여긴 못 가, 저기도 못가”라고 말하지 않는 세상을 꿈꿔요. 딸이 어디든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제 딸을 보면서 육체적 자유가 정신의 자유를 만든다는 걸 깊이 느껴요. 반대로 몸이 휠체어에 갇혀 있다고 느끼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됩니다. 아이가 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 넓어져서 마음도 자유로워지면 좋겠어요. 제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훨씬 자유로워지는 세상이 되길 꿈꿉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저의 목표이고요.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