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평이 300평이 된 이야기

Writer. 오복동((前) 한국국토정보공사 가평지사장)

우리나라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만든 것은 20세기 초엽 임시토지조사국이 생기면서부터다. 당시 토지의 면적을 계산(積算)할 때에는, 실면적의 1/3씩 나오도록 조정된 플라니메타(이것을 3평 단위라고 함)를 사용하여 1필지의 토지를 각기 다른 세 사람이 손을 바꾸면서 측량원도 위에 제각기 한 번씩 측정하여 각 측정한 독수(독정한 수)를 합쳐서 그 토지 실면적으로 계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관계로 결국 세 사람을 각각 그 토지면적의 1/3씩 측정한 셈이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1/3씩 측정하게 했던 이유는 만약 한 사람에게 작업의 전부를 맡길 때에는 개인오차나 과오를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토지의 면적은 1필지를 3번 측정하되 반드시 사람을 바꾸고(물론 사용하는 기계도 바꿨다) 먼저 측정한 성과, 즉 숫자는 이를 뒷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봉해 버렸다. 임시토지조사국 당시의 면적 계산착오는 총 조사 필수 약 2,000만 필 중에서 불과 수십 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신화에 가까울 만큼 오류가 적었다는 이야기다. 오래된 자료를 보다 보면 가끔 토지의 면적이 잘못된 것이 발견되지만 이는 전부 임시토지조사국의 측량이 끝난 뒤 이동정리를 할 때 그르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1914년 6월 30일 토지조사사업의 주무관서이던 임시토지조사국 훈령 제25호로 제정된 “제도적산규정” 제33조 구적기(플라니메타)에 의한 면적측정은 ‘1필지마다 3회 이를 행할 것’. 제34조 전조의 측정은 ‘매회 작업자를 달리하고 또한 전회 측정의 결과를 엄폐(掩蔽: 가리어 둠)할 것’이라고 하여 법규로서 규제까지 하였던 것이다. 임시토지조사국에서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각 시·군에 이관한 뒤에는 전기한 제도적산규정 대신 1921년 3월 18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10호로 《토지측량규정》을 제정하고 제51조에 “지적(地積=면적)은 계적기를 사용할 때에는 3회 독정하고… ”라고 하여 1필지의 면적은 3번 측정한다는 점만 밝혔을 뿐, 반드시 사람을 달리한다든가 혹은 먼저 독정한 결과를 가리라는 등의 규정은 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뒤부터 면적계산은 경비·인원 등을 고려하여 동일인이 동일기계로서 연속 3회 독정하여 그 합계를 산출면적으로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편, 제49조에는 “면적은 1지번마다 측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토지분할의 경우 분할된 토지 중 1필지의 면적이 원지면적의 약 80%이상 되는 것이 있을 때에는 원지면적에서 다른 분할지의 면적을 공제한 것을 그 면적으로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를 알기 쉽게 말하면 1,000평짜리 토지를 900평짜리와 100평짜리로 분할할 경우, 100평짜리만 플라니메타로 면적을 측정하고 이를 1,000평에서 빼면 남은 토지는 900평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900평짜리는 면적측정을 하지 않고 차인계산만으로 산출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작업의 간편을 꾀하는 방법으로서 아주 편리하다 하겠으나 2필지 중에서 1필지만 면적을 측정하기 때문에 작업의 과오를 검증할 수 없는 아주 불안한 방법이었다.

당시 사용되었던 극식 구적기(플라니메타)

1938년 4월 1일부터 재단법인 조선지적협회는 업무수탁을 개시하면서 그때까지 개인자격으로 집행해 오던 지적측량업무를 새로 생긴 조선지적협회라는 단체에 묶어 놓았다. 이 때문에 생소한 제도로 말미암아 직원들이 모든 분야에서 서툰 실수를 저질러 곤란한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조선지적협회 업무개시 초기인 1938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함경남도 함흥 시가지 주변에는 일본의 군사시설이 많았는데 긴급을 요하는 군용지 분할측량을 새로 조선지적협회에 의뢰해 온 일이 있었다. 이 업무를 협회에 새로 채용 된 K씨가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적측량 자격제도가 없었고, 다만 지적주무관청인 세무감독국에서 그 기술을 인정하면 그만이었던 시절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분할측량대상 토지는 원지면적이 약 2,000평이었고 이것을 약 1,700평짜리와 약 300평짜리와의 2필지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300평의 용도는 비밀군사시설 부지였던 모양이다. 이 업무는 조선지적협회 함흥지부(당시는 세무감독국별로 지부가 있었음)에서 직접 수탁하여 전기와 같이 측량, 면적계산, 토지분할신고서 작성까지 끝내고 당시 군용지의 관리청인 서울의 조선군사령부 토지분할신고서에 도장을 찍어 돌려보내 달라고 공문을 보냈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무절차로, 이 공문을 받은 조선군사령부에서는 조선지적협회 함흥지부에 공문(公文)으로 “면적계산이 실지보다 아주 작게 된 모양이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내용을 회신하였다.

이 공문을 받은 K씨는 불쾌한 기분으로 측량원도를 꺼내어 플라니메타로 약 300평짜리 필지를 다시 측정하였다. 그런데 그 독수가 앞서 측정하였던 100이 그대로 나왔다. K씨는 독수만을 확인하고 다른 것은 하등의 검토 없이 조선군사령부에 “절대로 틀리지 않으니 안심하고 도장이나 찍어서 보내시오.”라는 내용의 회신문을 보냈다. 그 뒤 약 5일 만에 이번에는 조선군사령부의 문관이 직접 조선지적협회 함흥지부에 와서 “측량기술자가 아닌 우리들의 짐작으로도 이 토지는 300평은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조선지적협회에서는 100평이라고 주장하니 납득이 가지 않는다.”라고 항의하기 이르렀다. 자기의 기술에 자신이 있었던 K씨는 다시 측량원도를 꺼내어 플라니메타로 돌렸다. 그러고는 100이라는 독수가 나오는 것을 그 문관에게 보이며 협회 측에는 잘못이 없다고 응수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맞다고 옥신각신했다. 그것을 옆에 보던 직원들은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K씨의 잘못을 발견했다. K씨는 3평 단위의 플라니메타로 100이라는 독수가 나오면 이는 100×3=300평이라고 해야 할 것을 1평 단위로 착각하고 그냥 100평이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필지의 면적은 2,000평 – 100평 = 1,900평이라고 차인계산을 하였다. 실지는 1,700평과 300평짜리로 분할되면서도 서류상으로는 1,900평짜리와 100평짜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문관은 “신이 아닌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과실”이라고 웃으며 그 신고서의 면적 100평을 300평으로, 1,900평을 1,700평으로 고치고 조선군사령부에서 분할신고서에 도장을 찍음으로써 사건은 일단락이 지어졌다. 이 사건은 그 뒤 아주 좋은 결말을 가져왔다. 즉 면적계산에서 “차인계산제도”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과실은 즉시 발견 시정되었을 것이므로 이는 제도상의 결함이라고 하여 비단 K씨 혼자만의 과실이라기보다는 ‘전 지적사무의 과실’이라고 판단한 함흥세무감독국 지적계는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즉 면적계산에서 차인계산을 해야 할 경우라도 반드시 플라니메타로 1회를 측정하는 것으로 검증함으로써 차인계산을 할 때에 일어나기 쉬운 착오를 미리 막도록 관내 12개의 세무서와 조선지적협회 각 출장소에 예규로 통첩하였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그로부터는 이러한 과실이 근절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용되었던 토지신고서